..

페스트 | 알베르 까뮈

image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170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그때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테라스 쪽으로 올라오는 것은, 으레 도시의 언어를 이루게 마련인 차량과 기계 소리들 대신 둔탁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빚어내는 거대한 웅성거림뿐이었는데, 그것은 무겁게 덮인 하늘로부터 나오는 윙윙거리는 재앙의 휘파람 소리에 리듬을 맞추는 수천의 구두창들이 고통스럽게 미끄러져 가는 소리였으며, 차츰차츰 온 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 그리고 그 당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맹목적인 고집에다가 저녁마다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음울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저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p.243


“참 인정이 없군요.” 하고 누군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꼭 그만큼의 인정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의 인정이 어떻게 사람을 살려 주기에 충분할 수가 있겠는가? p.251


그는 사건이 진행되는 형편에 대해서 불만이 없었다. 그는 가끔 타루 앞에서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자기 생각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표현하곤 했다. “물론 더 나아지지는 않아요. 그러나 최소한 다른 모든 사람도 함께 당하고 있는 거죠.” p.254


그런데 아무도 단죄할 권리를 인간에게 주지 않았던 타루, 그러면서도 누구도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희생자가 때로는 사형 집행인 노릇을 하게 됨을 알고 있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며, 희망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리유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p.379


반대로, 인간을 초월해, 자기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던 사람들은 결국엔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p.391